미인계에 걸려들어 심심풀이 하다간 쪽박찬다
‘블랙홀’, ‘도깨비 소굴’
강원랜드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이렇게 부른다. 한번 빠지면 빈털터리가 되지 않고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탓에 붙여진 별명이다. 최근 이곳에 또 하나의 애칭(?)이 생길 판이다. 인근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신종 ‘사기도박단’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이곳에 고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사기도박단이 활개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른바 ‘꾼’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소문이 이미 기정사실화 돼있는 듯한 분위기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는 OO가 당했다더라” “△△가 걸려 얼마를 잃었다더라” 등의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람들이 많이 없는 밤늦은 시간에 게임장을 나서는 사람들이 이들의 주요 표적이다. 요컨대 새벽에 카지노장을 나오는 사람에게 접근해 시내까지 태워달라고 한 뒤, 사기도박판으로 유인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로라제팜’과 같은 마약류를 먹인다는 소문이 피해자들을 통해 끊이지 않고 제기되고 있다.
소문의 진상 확인을 위해 직접 강원랜드를 찾았다. 취재진이 강원랜드에 도착한 것은 23일 밤 10시. 서울에서 승용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정선에서 다시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한시간 정도 달리자 산등성이 위로 웅장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신출귀몰 사기도박단
강원랜드측은 이미 ‘신출귀몰’한 사기도박단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듯 했다. 이곳에서 만난 한 카지노 관계자는 “고객들로부터 사기도박에 당했다는 항의가 부쩍 늘었다”며 “대책을 고민하다 얼마 전부터 전광판을 통해 경고문을 내걸고 있다”고 말했다.
카지노의 로비에 들어서자 이 관계자의 말처럼 사기도박에 주의할 것을 당부하는 전광판 안내문이 눈에 들어온다. “최근 들어 사기도박으로 인한 피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들은 로비나 객장에서 고객에게 접근, 교묘한 방법으로 제3장소로 유인하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게 전광판 안내문의 내용.
화장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고객 안내문’으로 시작되는 사기도박 경고문이 곳곳에 붙어있다. 심지어 카지노가 폐장하는 새벽 6시에 방송까지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좀처럼 피해가 줄지 않고 있다는 게 카지노측의 설명이다.
사정이 이렇자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실제 경찰은 최근 강원랜드 일대에서 사기도박을 벌이던 일당 5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운영되고 는 게 특징이다.
게임장을 나오는 사람에게 접근해 시내까지만 태워달라고 하는 역할은 주로 미모의 중년 여성들이 담당한다. 사건을 수사한 정선경찰서 김석우 계장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고마움의 표시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해서 미리 약속된 식당이나 다방으로 유인한다”며 “이 경우 대부분은 미모의 여성들이 접근하기 때문에 표적이 된 상대는 안 넘어갈 수가 없다”고 설명한다.
여성들의 유인작전이 성공하면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한다. 연락을 받은 나머지 조직원들이 손님인 척 식당에 들러 피해자에게 접근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얼굴을 익히면 “카지노 개장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심심풀이 고스톱이나 치지 않겠냐”며 미끼를 던진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심심풀이로 시작된 고스톱의 판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느새 기본 판돈이 수십 만원을 넘게 된다. 자연히 나가는 돈의 액수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지난 몇 개월 사이에 피해를 당한 사람은 9명. 사기도박으로 인한 피해액수만 2억여원에 달한다. 보통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 정도지만 배모씨(35)의 경우 불과 몇 시간 사이에 1억3,000여만원을 잃기도 했다는 게 경찰측의 설명. 실제 피해는 경찰이 파악한 수준을 훨씬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돈 세탁조까지 운영
경찰조사 결과 사기도박단들은 커피나 음료수에 약을 타기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를 담당한 한 경찰은 “이들은 승용차에 ‘로라제팜’이나 ‘디아제팜’과 같은 마약류를 수 백정씩 휴대하고 다녔다”며 “정상인 상태에서 붙어도 상대가 안되는데 약까지 먹까지 먹었으니 돈을 잃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아니겠느냐”고 귀띔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경찰 추적을 피하기 위한 ‘세탁조’까지 따로 운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경찰에 따르면 도박에서 딴 돈은 보통 과천 경마장이나 인근의 전당포를 통해 세탁된다. 경찰은 “피의자들은 보통 한 두개의 차명계좌를 가지고 있었다”며 “전당포에 10%의 마진을 주거나 과천 경마장에 줄을 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돈을 세탁해온 것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결국 3달 여의 추적 끝에 지난 11일 홍모씨(41) 등 5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조직원에게 마약류를 제공한 의사 김모씨(35)는 불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13명의 종적이 오리무중인 상태. 때문에 추가 범행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경찰측의 우려다.
사기도박을 벌이는 조직이 이번에 검거된 조직 외에도 여럿이 된다는 점도 문제다. 경찰은 “달아난 잔당 이외에도 2~3개의 조직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추가 피해자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점조직으로 수사에 애먹어
경찰은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카지노측의 적극적인 대응이 중요하다고 주문한다. 경찰은 “메인 카지노를 중심으로 사기도박 일당이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은 지난 7월부터 나돌았고, 경찰에 피해를 호소하는 전화도 잇따라 접수됐다”며 “그러나 점조직으로 운영될 뿐 아니라 명확한 물증이 없어 수사에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찰은 “당시에 카지노측이 적극적으로 대응했더라면 상당수 피해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경찰의 조언을 받아 지난 11월부터 고객 안내문을 내걸기는 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 밖에 더 되겠냐”고 지적했다.
그러나 강원랜드측은 적극적으로 나서기가 힘들다는 입장이다. 강원랜드 홍보팀의 한 관계자는 “사법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날고 뛰는 사기범들을 어떻게 막겠느냐”며 “현재로써는 적극적인 계도를 통해 추가 피해자를 막는 방법 이외에 도리가 없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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